2011 서울역사학술대회 개최- 2천년 역사 도시 서울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위원장: 신형식)에서는 ‘2천년 역사도시, 서울’을 주제로 지난 9월 2일(금)에 한성백제박물관(올림픽공원 소재) 대강당에서 “2011 서울역사학술대회”를 개최했다.. 1994년은 조선왕조가 서울을 수도로 정한 지 6백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발맞춰 서울시에서 “정도 6백년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한 바 있다. 시사편찬위원회에서도 1977년부터 2006년까지 30년에 걸쳐 《서울六百年史》 총 10권을 발간한 바 있다.그 결과, 일반 시민 사이에서도 ‘서울 역사 6백년’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통용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우리 서울의 역사는 6백년이 아니다. 백제가 현재의 서울에 도읍을 정한 때가 기원전 18년이므로 이때부터 계산해도 2천년이 넘는다. 수도로서의 역사만 따져도 1천년이 넘는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이르기까지 2천년 간 서울이 어떻게 변해 왔고 각 시대별로 어떠한 위상을 가졌는지에 초첨이 맞춰졌다.. 백제의 수도 한성은 백제 전성기를 이룬 지역 기반이었다. 이후 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서울 지역을 차지했고,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는 한강유역의 신라 귀속을 기념하는 상징물이었다. 통일신라시대 김대문은 서울의 역사를정리한 《한산기》를 편찬했다. 고려는 서울을 제2도시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궁궐관아객사향교역참과 나루 등 도시시설을 마련했다. 남경의 도시시설은 조선이 수도를 건설할 때 그 기반이 되었다. 계획도시로 건설된조선의 수도 서울은 조선왕조의 정치행정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조선후기에는 전국의 물자가 반입반출되는 상업도시로 발전했다. 고종은 왕도(王都) 서울을 황도(皇都)로 개조하고자 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과 독립문을 건립하는 한편, 종로-신문로를 잇는 서울의 동서축을 중심으로 각종 건축물을 조성했다. 황도 구상의 정점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1902년부터 추진했던 ‘고종황제 망육순(望六旬) 어극(御極)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이었다. 광복 이후 인구의 급증으로 서울의 영역은 대폭 확장됐다. 전쟁과 남북분단의 현실은 서울의 도시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강남개발이 시작됐으며 ’88서울올림픽은 강남개발의 완성으로 연결됐다. 그린벨트 설정은 서울의 물리적 확장을 억제했지만, 건물이 초고층화되는 등 서울의 도심부 도시조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분당일산 등 5개 신도시 건설 사업은 서울의 행정 경계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기능적인 경계가 작동하는 수도권을 광범하게 형성하는 기반이 됐다. 한국사 속에서 서울의 위상이 존 희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한강은 한반도의 동북부 및 동남지방으로부터 우리나라 허리인 중앙지대를 관통하여 서해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 497.5km의 긴 강이다.북한강은 강원도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하여 화천, 춘천, 남이섬, 남양주를 거쳐 양평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며, 남한강은 대덕산 금대봉 기슭에서 발원하여 영월, 단양, 충주, 여주를 거쳐 양평에서 북한강과 만나 팔당을 거쳐 서울로 진입, 서진하여 서해로 유입된다. 한강은 삼국시대 초에는 ‘대수(帶水)’ 라 하였고 광개토왕 비문에 ‘아리수(阿利水)’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욱리하(郁里河)’로나타나 있는데, 백제가 동진(東晉)과 교류하면서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자 그 후부터 중국식 명칭인 ‘한수(漢水)’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漢)’은 ‘크다’는 한자어이기 때문에 큰 강이라는 의미로 불렀을 가능성 있다.북한강은 강원도의 동북부지방 및 동해안의 문화를 서해안 쪽으로 운반하는 통로였고, 남한강은 한강하류의 문화를 중부내륙으로 유통시키면서 이를 다시 조령. 죽령을 넘어 낙동강유역에 퍼지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즉, 한강이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관통하면서 문화의 동서교류에 크게 공헌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강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서울은 내륙의 지형적 영향으로 남북 간의 교류가 잘 이루어진 곳이다. 추가령지구대를 통해서이다. 추가령지구대는 원산 영흥만에서 시작하여 서울을 거쳐 서해안까지 호(弧)를 그리며 전개된 좁고 낮은 긴 골짜기이다. 이곳은 옛날부터 서울과 원산지역을 연결하는 경원가도로 중요한 교통로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이 지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내왕하고 문물의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한강이 흐르는 서울은 한반도에 있어서 남과 북, 동과 서가 소통하는 관문(關門) 역할을 한 곳이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이와 같이 한강 유역은인류문화의 발생조건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에 일찍이 백제가 이곳에서 문화를 꽃피우고 그 전성시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백제는 한강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한강을 버린 백제는 결국 쇠락의 길을 걷다가 멸망하고 말았다.이러한 자연조건을 갖춘 한강유역은 역사적으로 우리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뒷받침해준 민족의 젖줄이라는 것이 입증된 곳이다. 한성백제시기로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이곳 서울에서 당대의 경제적 가치와 문화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자칫 소홀히 하기 쉬운 신라의 한산주(한주)의 역할과 고려왕조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한양천도론 등에 관심을 집중시킬때 우리는 한강변 지정학적 평가가 당시 얼마나 중시되었는지 알 수 있다.수도는 국가의 상징이다. 런던, 파리, 로마 그리고 북경, 동경 등은 각기 그 나라의 얼굴이다. 그런데 서안과 낙양이 오늘의 북경으로 연결되지 않고, 일본의 경도가 오늘의 동경으로 계승되지 않은 반면 서울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심에서 있었고 민족의 동력이고 국가의 심장부였다.일찍이 진흥왕 때 북진하여 한강을 차지했기 때문에 신라는 3국 중 최강국이 될 수 있었고 민족통일을 성취하여 통일신라의 번영이 가능해졌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북진전진기지로 9주 개편 시에 한주를 두고 28개 군과 49현을 이 곳에 배치하였으며, 여주, 이전에는 2개의 군사부대를 배치하여 한강유역 서울일대를 방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경덕왕 21년(762)에는황해도 남부일대에 성을 축조하여 예성강을 경계로 한강지역을 보호하려는 의지도 보였다. 그러므로 한강이 흐르고 있는 한주는 신라에 있어서 중요한 정치적·군사적인 요충지였고, 민족의 북진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풍부한 생산력으로 국가의 부를 창출해 낸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고려왕조에서도 황해도 남부와 예성강 서부 그리고 한강 북쪽일대는 건국과정에서 중요시되는 지역이었다. 성종2년(982) 12목 설치 때에는 황해도2곳(황주,해주), 한강 북부유역 2곳(양주, 광주)이 포함되었으나 현종 9년(1018)의 5도 양계는 양광도가 설치되면서 황해도 지방은 중앙에서 벗어나 한강유역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는 거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가 거란과의 30년 전쟁(993~1019)을 치른 뒤, 이제 임진강, 예성강이남 서울지역(양주이남)을 제2의 수도(남경)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서울지역은 수도 개경을 보호하는 배후기지로서의 역할 뿐 만아니라, 정치, 경제,군사, 교통 상으로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남경 없는 개경은 생각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의 탄생과 함께 한양천도가 이루어진 것도 이와 같은 고려말의 정치적·군사적 분위기가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한양천도 후 조선왕조는 516년간(1394~1910) 이곳에서 영광과 아품의 시간을 함께 걷다가 1910년 8월29일 일제에 의해 국치를 당했고, 그해 10월부터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치면서 수도의 행정조직이 아닌 지방행정조직을 준용한 체제로 개편하였다.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사도 새로 건축하여 식민통치의 본거지로 삼았다. 광복과 함께 서울은 고유명칭을 회복하였다. 1946년 9월18일에 미군정청 법령 제106호로 ‘서울특별시 설치’를 발표했고, 법령발효일인 9월28일부터 ‘서울특별시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역사는 이렇듯 길고 변화무쌍하였다.서울시민들은 또 2천년 전 한성백제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살았다. 마치 백제역사는 서울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서울은 한반도 전체를 놓고 볼 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서울은 항상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고 비록 수도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였더라도 늘 역사발전의 중심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곧 실현될 통일한국의수도 역시 ‘서울’이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서울은 2천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이며 현재도 18.627km의 도성으로 주위가 둘려 쌓여져 있다.왕궁, 종묘, 사직단, 동대문과 남대문, 창의문 등의 성문이 현존하면서 유구한 역사를 빛내고 있다. 이곳에는 1천만 시민이 조상의 숨결을 호흡하면서 역사발전의 주역으로 살아가고 있다.우리는 2천년의 백제사를 복원해야 한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한반도 중부지방을 흐르는 기름진 한강유역은 살기 좋은 곳으로 백제가 이곳에 둥지를 틀고 국력을 신장시켜 한반도 내외에 명성을 떨쳤다. 한강은 민족의 젖줄로 우리의생활터전이었으며 민족을 단일화하고 문화를 융합하는데 구심점이 되었던 곳이다. 지방마다 지역마다 풍속이 다르고 습관이 같지 않은 이질적 문화현상을 서울에서 하나의 동질문화로 융합시켜 나갔다. 오랜 시간과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역사의 산물이다. 지방의 방언들이 하나로 표준화되어간 것이 좋은 예가 된다.충효사상을 기본철학으로 삼는 성리학의 발달은 인간의 행동과 사유체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회윤리와 가족질서의 확립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실천을 중요시한 조선왕조 성리학 때문이다.5백여 년 간 지속된 조선왕조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외적의 침략을 받아 국가의 위기를 맞았으나, 혼신의 노력으로 나라를 빼앗기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1910년 국치의 슬픔을 당해일본에게 35년간이나 나라를 넘겨주어야 했던 아픈 상처는 결코 잊지 못할 마음의 앙금으로 남는다. 당시 서울은 항일운동의 진원지이고 애국지사들의 활동무대였다. 광복 후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88올림픽과 월드컵 경기를 통해 세계적인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서울은 미래 통일 한국의 수도로서 지위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서울은 남북 7천만 민족의정신적 고향으로, 대한민국의 발전 모델로, 세계인의 선망대상으로 계속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 길 만이 현 서울이 지닌 역사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끝으로, 역사도시 서울이 고도(古都)보존지역으로 지정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2005년 3월 5일자로 정부는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공포한 바 있다. 이 법에 명시된 내용으로 공주, 부여, 익산은 백제의 고도로 적시했으나 백제가 탄생한 요람이고 백제가 493년간이란 긴 세월을 이곳에서 성장발전하면서 그 전성기까지 맞이했던 서울이 고도보존 대상지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은 큰 과오와 착각이 아닐 수 없다. 2천년 고도 서울의 역사가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고대한다.삼국∼통일신라시대 서울 지역의 위상노 중 국 (계명대학교 교수)백제왕은 중국왕조와 책봉관게를 맺으면서왕호와 더불어 장군호를 받앗다. 최초의 장군호는 여구(餘句.근초고왕)가 372년에 동진으로부터 받은 진동(鎭東)장군이다. 이후 역대왕들은 중국 왕조로부터 왕호와 더불어 진동대장군이나 영동(寧東)대장군 등의 장군호를 받았다.한편 백제왕은 자신의 신하들에게 왕.후호(候號)와 장군호를 수여했다. 백제의 장군호는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장군들에게 수여한 위세품으로는 장식대도가 있는데 이를 입증해주는 것이 무령왕릉이다.한성도읍기 백제문화의 특징의 하나는 토목건축기술의 발달이다.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풍납토성이다. 이 토성의 축소에 부엽공법이 활용되었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것이 김제 벽골지이다.백제토목기술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하언의 축조이다. 언(堰)은 하류를 다스리고 수위를 높이고 수량을 조절하는 고도의 토목 기술이다. 아울러 중국 왕조와의 교섭과 교류를 긴밀히 하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3~6세기에 백제지역에서는 중국 도자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백제는 475년에 장수와의 공격을 받아 왕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붙잡혀 죽어 거의 멸망하다시피 하였다. 이런 위기상황속에서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고구려는 475년에 백제의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유역 일대를 차지하였다. 이를 해명하는 단서가 되는 것이 551년에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6군과 10군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에 주둔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은 한성의 몽촌토성이었다. 이 지역도 그다지 오래지 않아 북한산군(남평양)으로 옮겼다. 항강 북안에 설치된 아차산보루, 구의동보루, 시루봉 보루 등 고구려 군사보류는 한강을 지키려는 의도와 더불어 거점성인 양주를 보호하기위한 목적에서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핵심적인 거점성은 고구려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나 장수가 맡앗을 것이지만 거점성 아래에 두어진 성의 경우에는 재지유력자들을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사비천도 후 국력을 다진 성왕은필생의 사업으로 한강유역 회복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성왕은 신라, 가야를 끌어들여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551년 9월 삼국연합군은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쳐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을, 신라는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하게 된다.한편 이시기 고구려는 남으로는 삼국, 서북지역에서는 돌궐의 압박으로 어려움에 처한다. 이런 상황에 신라가 백제 계획을 통보하면서 고구려는 신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힘들이지 않고 한강 유역을차지했고 평양지역은 고구려가 차지한 것 같다.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곳에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 신주의 관할범위는 한성을 중심으로 한 그 이남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성을 차지함으로서 신라는 이 지역이 가지는 경제적 이득을 확보하였을 뿐 만아니라 중국으로 직접 통할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한강유역을 완전히 정복한 진흥왕은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웠다.대한민국 수도서울의 압축성장과 도시의 변화안 창 모 (경기대학교 교수)오늘의 한국경제는 국가주도 ‘불균등성장 전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 전반과 전국을 고르게 성장시키기보다는 몇몇 부문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로 파이를 키운 후 크게 키운파이를 나눠 갖자는 전략으로 오늘의 한국이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전국 각 지역을 고르게 발전시키기보다는 대도시 중심의 성장전략이 세워졌고, 특히 서울의 발전에 집중적인 투자와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불균등성장전략은 한국의 도시성장 특히 서울의 성장 및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90년대까지 서울의 도시계획은 빠르게 성장하는 서울의 미래를 주도했다기보다는 성장의 결과를 뒷받침하는 성격이 강했다.최근 정부에서 ‘전국 각지역의 균형 발전’을 내세우면서, 수도 분산과 지방도시 육성을 위한 각종 도시발전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과거 불균등성장 전략이 양산해낸 구조적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치유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울에서 강남북의 불균등한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균형발전전략을 내세우는 것도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내사산을 경계로 조성된 서울은 개항이후 꾸준하게 시역을 확장해 왔지만, 도시경계의 형성은 항상 산과 개천 등 자연지형을경계로 확장되어 왔다.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급증한 서울의 인구는 시역의 확장을 가져왔고, 시역의 확장은 도시구조의 변화와 함께 도시조직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는 새롭게 시역에 편입된 지역과 기존 시역과의 새로운 관계설정과정에서 교통체계의 변화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화 없는 근대화 과정을 겪은 한국의 경우 산업화 없는 근대화를 식민지적 상황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서구나 일본과는 다른 도시성장에 따라서, 다른 도시구조와다른 도시조직을 갖게 되었다. 노동자가 아닌 사무직 노동자를 위한 근대도시주택의 공급이 도시구조와 도시조직의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동인이었다는 사실은 자생적 근대화를 겪은 서구제국이나 일본의 도시와는 구별되는부분이다.서울의 도시변화에 미친 영향중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 전쟁이다. 해방 전 태평양전쟁의후유증으로 인한 역사도시구조의 변화와 6.25전쟁으로 인한 도시조직의 변화는 전쟁이 도시의 변화에 미친 직접적인 결과다. 그러나 1960~70년대에 걸친 남북 사이의 냉전체제는 전쟁 이상으로 도시구조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1.21사태이후 본격화된 강남개발은 식민지도시구조를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경제적 빈곤 속에 이루어진 강남개발은 강북의 쇠락으로 이어졌으며, 88서울올림픽은 강남개발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강남개발의 완성은 동시에 쇠락한 강북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강남북균형개발론으로 이어졌다.무한히 확장될 것 같던 시역에 근본적인 제동이 걸린 것은 그린벨트의 설정이었다. 그린벨트의 설정은 단순히 수평적으로 확장되던 도시의 물리적 확장을 막아 무분별한 도시확장을 막고 자연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이외에, 도심의 고층화 유도를 통해토지효율을 높이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린벨트의 설정은 도심부의 고층화를 유도하는 정책으로 이어졌고, 역사도시의 중심에는 재개발사업지구가 설정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린벨트의 설정은 도시의 물리적 확장은막았지만, 역사도시의 도심부 도시조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시역이 확장된 지역은 대부분 도시주택으로 채워졌는데, 이는 도시의 확장과 도시 조직의 변화의 핵심에 근대도시주택이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개항이후 행정경계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졌던 도시구조의 변화와 도시조직의 변화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것은 1989년에 발표된 수도권 5개 신도시 건설이 발표된 이후다. 신도시는 출퇴근이 가능한 물리적 거리안에 조성되어, 서울의 베드타운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서울에 종속된 성격을 강하게 갖게 되었으며, 서울은 행정경계나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 기능으로 규정되는 도시경계를 갖게 되었다고려∼조선시대 수도로의 지위 상승이 상 협 (서울여자대학교 강사)백제가 475년 수도를 공주로 옮긴 후 지금의 서울지방은 한동안 정치적 중심무대에서 소외되기도 하였으나, 11세기 중엽 고려 문종 때에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삼경제도(三京制度)를 마련하여 남경을 설치, 운영하면서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조선의 한양천도 때는 이렇다 할 고려의 도시시설이 남아있지 않아 옛 한양부의 객사에 임시왕궁을 정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이도읍시설을 갖추면서 전혀 새로운 도시로 탄생한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고려시대 오늘날 서울지방에는 자연지세를 배경으로 풍수지리적인 명당 터에 많은 도시시설들을 갖추었으며, 남경의 도시시설 배치는 조선의 도읍지 한성부로 다시 태어날 때 그 배경이 되고 연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은 여러 도읍 후보지 가운데 선정되어 천도가 이루어진다. 오늘날 서울지방은 고려 초기에는 양주로서 수도 개경을 보좌하는 요지가 되었다. 문종때부터는 고려 삼경의 하나로서 남경으로 승격되어 2세기동안 지속되다가 충선왕 때에 한양부가 되었다. 그리고 공민왕 이후 한양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한양천도운동이 전개되어 비록 몇 개월만에 환도했지만우왕과 공양왕 때 두 차례나 한양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졌다.오늘날 서울지방은 고려시대에 양주남경한양부로 개편되면서 궁궐을 비롯한 관아와 객사향교성황당역참과 나루사찰정자 등 많은 도시시설을 갖추었으며, 이러한 시설들은 조선시대 도읍인 한성의 도시시설로 자리잡는데 그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서울의 역사지리적 특성과 전통은 끊임없이 전 시대의 문화적 축적을 바탕으로 발전되고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게한다.한성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도로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소경제도(小京制度)를 마련하지 않고 정도(定都)한 뒤 500여 년간 이곳에서 찬란한 민족문화의 꽃을 피우면서 수도로서의 위상을 높여갔다. 한성은 이제 한 지역 행정단위에서 국왕이 임어하는 왕도요 수도가 되었다. 그 이름은 경도(京都)경사(京師)경조(京兆)와 함께 도성(都城)도읍(都邑)수선(首善) 등으로 다채롭게 불렸다.한성은 주산인 백악 아래 경복궁을 두고, 종묘와 사직을 설치하였다. 경복궁 앞에는 주요관아들이 들어서 정치행정의 중심이 되었다. 내사산을 연결한 도성을 쌓았으며, 도성에 사방으로 4대문과 4소문을 내고, 도성 안팎으로 도로를 닦아 전국으로 연결되는 교통망을 만들었다. 이 교통망을 통해 전국의 물자들이 한양으로 운반되었다. 또한 종로 일대에 시전행랑을 설치하였으며, 내사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정비하여 개천을 만들고 개천 곳곳에 많은 다리를 가설하였다. 이처럼 한성은 자연과 건조물이 잘 어우러진 계획도시였다. 이같은 한성부의 도시계획은 조선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서울시가지계획의 기본이 되고 있다.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조선사회는 정치경제사회사상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상공업의 성장, 이에 따른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촉진되고 있었다. 한성은 자연스럽게 유통의 중심지로 자리하게 되고 상업도시로 발전하게 된다.한성의상업도시로의 성장과 발전에는 정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은 특권상인의 역할보다는 새롭게 등장한 사상들의 활동이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서울이 상업도시로 성장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강 연변에서 활동하던 경강상인들이다. 이들은 도성 내외의 사상들과 연계하면서, 또 한성만이 아닌 전국적인 유통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이와 함께 경강선인들은 세곡 운송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한성이 상업도시로 성장 발전하는데 근본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성은 조선 후기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나타났던 많은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서울, 1902-대한제국의 황도(皇都) 구상에 대한 소고(小考)전 우 용 (서울대학교 강사)1906년 7월,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제4회 회의석상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신설할 대한병원 부지로 경희궁에 인접한 서대문 밖 황실 소유지를 지목했다. 이에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그 땅은 “궁전(宮殿) 건축 예정지여서 폐하께 주청한 뒤에 결정할 수 있다.”고 답했다. 궁내부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대신 경모궁을 내줬다. 2년 뒤인 1908년 7월, 통감부는 1910년에 한일 합동의 권업박람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그 장소를 경희궁으로 정했다. 석 달 뒤에는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전사한일본군을 위한 합동 진혼제가 경희궁에서 열렸다. 1911년 6월, 이왕직(李王職)으로부터 경희궁의 토지 건물 일체를 인계받은 총독부는 1913년 5월 일본인을 위한 고등소학교를 이곳으로 옮겼다. 한국 황실은 나라가 망해가는 형편에 무슨 궁전을 더 짓겠다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총독부는 왜 그토록 경희궁에 집착했고 결국 ‘완전히’ 소멸시켰을까? 대한제국 시기 서울 공간의 변모에 대해서는 역사학, 건축학, 도시계획학 등 각 분과학의 학제적 관심이교차하면서, 이미 상당한 연구 성과가 축척되었다. 황궁의 정비, 도로의 신설과 개수, 주요 ‘근대적’ 건축물의 신축, 전차 부설과 신(新) 시설의 설치 등 도시 변화의 구체상에 대해서는 일부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으나 대략 규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변화를 일괄하여 ‘근대도시화 과정’으로 이해하거나 그 중 국가 권력이 주도한 사업에 한정하여 ‘황도(皇都) 건설사업’이라 부르는 것은 이제 일반적이다. 그러나 현재의 이해 방식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하나는 전근대/근대를 전통/서구로 환치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다. 같은 때 지어진 건축물이라도 서양식 건축은 ‘근대 건축’, 전통 양식의 건축은 ‘전통 건축’으로 구분하고 이시기 서울공간의 변화를 ‘서구 근대적 요소’의 출현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교회, 학교, 공관, 사택 등 외국인의 건축 행위와 궁궐 내 양관(洋館) 등 국가 권력의 건축 행위가 동일 기준에서 포착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두 양식의 ‘혼효(混淆)’를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경운궁에서 중화전을 중건하는 한편으로 석조전 공사를 진행한것은 전통과 근대의 원칙 없는 공존이 될 뿐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시 공간에 표현된 결과물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자리한 당대인, 또는 당대 권력의 ‘의식 세계’를 살필 필요가 있다.둘째는 제국의 이념, 또는 이상과 도시 공간의 변화상이 연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 서울 조영에 대해서는 흔히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기초한 ‘유교적 이상도시론’과 ‘풍수지리설’의 조화를 운위(云謂)한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황도 건설’이 구현하려 한 체제 이념에 대한 논의는 거의 진전되지 않고 있다. 물론 ‘황도 건설’이라는 말 자체가 당대의 말이 아니며, 구체적인 계획안이 있었다고 볼 증거도 없다.‘황도 건설’이라는 개념은 현재에 파악할 수 있는 도시 변화의 ‘결과’들을 통해 당대 권력의 구상을 추측한 결과로얻어진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首都 공간을 국가 권력의 실존과 이상을 표현하는 텍스트로 삼았던 전례에 비추어 보자면, 이 시기 서울의 변화 역시 대한제국의 이념과 관련지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셋째는 대한제국의 이른바 ‘황도 건설 사업’이 완료된 사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사업은 대한제국 정부와 황제의 결정이 아니라 일본의 간섭에 의해서 중단되었다. 중도반단되고 왜곡된 사업의 결과물만으로 황도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는 근본적인한계가 있다.중화전이 완공된 1902년 가을, 경운궁은 꽉 차 있었다. 그럼에도 전통 궁궐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했던 요소들, 편전(便殿), 중전(中殿), 동궁(東宮), 자전(慈殿)이 없었다. 그 대신석조전, 돈덕전, 중명전 등 양관이 궁궐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보자면, 궁궐이 표상한 것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이 아니라 ‘구반신반(舊半新半)’이거나 ‘신본구참(新本舊參)’이었다. 더욱이 경운궁은 황궁이라기에는 권역이 너무 협소했다.1902년 가을 어도(御道)로 홍교(虹橋)를 건설한 것은 일차적으로 경희궁 관병식(觀兵式) 참관을 위해서였을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경희궁을 경운궁에 결합하려는 의도도 담았던 것으로 보인다. 칭경예식이 수포로 돌아간 뒤에도경희궁 중건 공사는 계속되었다. 일제가 홍교를 철거하고 경희궁 부지를 집요하게 요구한 것은 이 의도와 구상을 꺾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1906년 봄까지, 황실이 서대문 밖 경희궁 인접지에 지으려 했던 ‘궁전’은 아마 경운궁이 갖추지못한 다른 법전(法殿)들이었을 것이다.칭경예식과 관련하여 급히 조성된 건축물들은 석고단을 제외하면 모두 종로와 신문로를 잇는 서울의 동서축선 위에 자리 잡았다. 서대문 밖의 숭의묘, 서대문 안의 협률사 원형 극장, 황토현 기로소 옆의 기념비전(紀念碑殿), 보신각 맞은편의 한성전기회사 신사옥, 탑골공원 안의 팔각정, 동대문 밖의 원흥사 등. 서대문 밖을 경의철도의 기점으로 삼고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한 것도 이와 관련하여이해할 필요가 있다. 칭경예식 전후의 서울은,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제왕남면(帝王南面)의 전통적 도성 조영 원칙에서 이탈하여 종로를 바로크적인‘장대한 직선 경관축’으로 하는 새로운 도시가 되었다. 더불어 새 도시의 메인스트리트가 된종로에는 최신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서양식 건축물’과 동양적 제국(帝國)을 표상하는 ‘전통 양식’의 건조물들이 함께 들어섰다. 궁궐과 중심 가로는, 동양적 제국이자 공법적 제국이라는 대한제국의 특수한 위상(位相)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공간이 되었다.1966년, 당시 김현옥 시장은 세종로 지하차도를 건설하면서 공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기념비전을 철거하려 했다. 원구단지 황궁우(皇穹宇) 옆으로 옮겨진 석고단 석고(石鼓)는 최근까지도 그 용도가 베일에 싸여 있었다. 탑골공원과 기념비전 기념비의 완공 연대는아직껏 잘못 알려져 있다. 1902년, 유사 이래 최초의 국제 행사로 기획되었던 “황제(皇帝)망육순(望六旬) 어극사십년(御極四十年) 양대(兩大) 칭경예식(稱慶禮式)”은 그렇게 잊혀졌고, 더불어 이 행사에 대비하여 진행된 ‘황도 건설 사업’의 전모도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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