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전 대통령 (사진출처=대통령기록관)
윤보선 전 대통령 (사진출처=대통령기록관)

  윤보선은 1897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개화한 기독교인 윤치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평 윤씨 가문 출신으로, 구한말 유력 가문이었다. 젊은 시절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에든버러대학에서 고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2년 귀국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 되어 칩거했다. 광복 이후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이승만 정부에서 서울시장과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여 반이승만 투쟁에 가담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5.16 쿠데타로 하야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윤보선은 도덕성과 민주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강경한 태도와 말년의 전두환 정권에 대한 호의적 태도로 일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윤보선의 대통령 재직 시절 주요 행적은 제한적이었다. 

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고, 총리 장면과의 대립으로 안정된 국정 운영을 보여주지 못했다. 5·16 군사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아 군부 세력의 정권 장악을 초래했다. 군부 세력과의 갈등 끝에 1962년 3월 22일 하야하여 재임 기간이 짧았다.

윤보선 대통령은 실질적인 권한 부족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뚜렷한 업적을 남기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짧았지만, 이후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윤보선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에 대해 소극적이고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쿠데타 발생 당일 오전, 박정희와 유원식 등 쿠데타 주모자들을 청와대에서 만났을 때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쿠데타 세력의 계엄령 추인 요구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장면 총리와의 갈등 관계로 인해, 쿠데타를 정적인 장면을 제거할 기회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쿠데타 진압을 제안했을 때도 이를 거부했다. 국가원수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합법 정부를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행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의 권력 장악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했고, 이는 군사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 후보 선출 과정에서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당시 구파에서는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신파에서는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이후 장면이 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민주당 내 신파의 영향력이 커졌고, 이에 따라 구파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구파는 장면에게 당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게 되었다.

제2공화국 출범 당시, 1960년 8월 12일 민주당 구파인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8월 19일 장면(민주당 신파)이 총리로 인준되면서 갈등이 더욱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신·구파 간의 갈등은 각료 자리를 둘러싼 내각 구성에서도 드러났으며, 이로 인해 장면 내각의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갈등은 제2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높이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장면 내각이 무너진 주요 이유중 하나는 내부 갈등이다. 민주당 내 신·구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국정 운영이 원활하지 못했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사이의 대립도 정부의 안정성을 해쳤다. 정치적 무능이다. 4·19 혁명 이후의 사회적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했다. 사회적 불안이다. 계속되는 시위와 사회 혼란이 지속되어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공산주의 세력의 활동이다. 이 시기에 지하에 숨어든 공산주의 세력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하여 사회 불안을 가중시켰다. 군부의 불만이다. 정부의 무능과 사회 혼란에 대한 군부의 불만이 쌓여 결국 5·16 군사정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장면 내각은 결국 1년도 채 되지 않아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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