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전적기념관 전경 (사진출처=칠곡군청)
다부동전적기념관 전경 (사진출처=칠곡군청)

  다부동 전투는 1950년 한국전쟁 중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다. 국군 제1사단과 미군이 북한군의 대구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이 전투는 낙동강 전선에서의 방어전으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대구를 방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전투는 8월 3일부터 9월 24일까지 여러 단계로 진행되었으며, 특히 8월 16일 미군의 융단폭격과 8월 21일의 전차전이 주요 사건이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큰 손실을 입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다부동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지점은 유학산이었다. 유학산은 다부동 방어선에서 핵심적인 지형이었으며, 이를 장악하는 것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유학산은 다부동 마을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북방을 향해 능선을 이루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이 산을 중심으로 주변 고지들이 대구를 방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군 1사단은 초기에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했고, 이로 인해 많은 희생을 치르며 다부동 전선을 방어해야 했다. 이는 전투 초반 국군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국군 1사단은 끝까지 다부동을 사수하며 대구 방어에 성공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네 개의 주요 축선을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 이 축선들은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 공격,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경주 공격, 창녕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 공격, 남해안을 따라 마산∼부산 방향의 공격이었다.

북한군은 대구 북방에 가용부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5개 사단을 배치하여 대구를 조기에 점령하려 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에 맞서 완전히 밀리지 않고 조금씩 땅을 양보하며 후퇴했다. 이는 적의 진격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었다. 후퇴하면서도 유학산과 같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지들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8월 11일 육군본부는 방어선을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했다. 이는 제한된 병력으로 더욱 효과적인 방어를 수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전라도에서 일부 잔여 국군 부대와 경찰 병력 등이 지연전을 펼치면서 소규모 전투를 통해 북한군의 진격을 방해했다.

정규군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자원하여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병력 부족 문제를 일부 해소했다. 이들은 주로 보병으로서 전선에 투입되어 북한군과 직접 교전했다. 일부 학도병들은 후방에서 보급, 통신, 의료 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전투를 지원했다.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전은 군인들과 국민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지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학도병들은 정보 수집 활동에도 참여했다.일부 학도병들은 민간인 대피 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전쟁 중 민간인 보호에 기여했다.이러한 역할을 통해 학도병들은 전쟁 중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특히 다부동 전투와 같은 주요 전투에서 국군의 방어에 큰 힘이 되었다.

이처럼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방어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대구 진출을 저지하고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다부동은 대구 방어의 핵심 요충지로, 이 지역을 지키는 것이 대구와 부산 방어에 결정적이었다. 다부동 전투의 성공은 낙동강 방어선 전체의 안정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반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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