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왼쪽)과 김우진(오른쪽) (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윤심덕(왼쪽)과 김우진(오른쪽) (사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사의 찬미는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인 윤심덕이 작사한 노래다. 윤심덕은 1897년 7월 25일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나 1926년 8월 4일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심덕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성악가이자 가수, 배우로 활동했다. 그녀는 일본 도쿄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귀국 후 순회공연과 연극 활동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1925년, 윤심덕은 대중 가수로 전향하여 '사의 찬미'를 발표했고, 이 노래는 큰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담은 가사로 유명하며, 한국 대중가요의 시대를 연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윤심덕은 도쿄 음악 학교 성악과에서 공부했다. 이는 그녀가 전문적인 성악 훈련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녀의 교육은 풍부한 성량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귀국 후 그녀의 공연은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로 대중을 사로잡았다.윤심덕은 학교에서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다. 이는 그녀가 나중에 세미클래식 음악으로 전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녀의 교육은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한 훈련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높다. 윤심덕은 "대형 오페라 가수를 꿈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 음악 학교에서의 교육은 그녀가 귀국 후 즉시 독창회를 열 수 있을 만큼의 전문성을 갖추게 해주었다.

윤심덕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던 주요 이유는 "사의 찬미"는 서양 클래식 작곡가의 멜로디에 윤심덕의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로 부른 노래로, 당시 한국 대중음악에서는 드문 서양 음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도쿄 음악 학교에서 전문적인 성악 교육을 받은 최초의 조선인 학생으로서, 그녀의 음악적 기술과 성량은 대중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윤심덕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었으며, 그녀의 노래는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담아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다.

사의찬미 가사 중에 "이래도 한세상 / 저래도 한평생 / 돈도 명예도 / 사랑도 다 싫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의 찬미]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 너 찾는 것 허무

이 가사 중 가장 유명한 구절은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로 이 가사는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담고 있으며, 윤심덕이 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배경에는 1926년 8월 1일, 일본에서 음반 취입을 위해 방문했을 때 예정에 없던 곡으로 즉석에서 가사를 썼다고 한다. 가사의 내용은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인 인생관을 담고 있다. 이는 당시 윤심덕의 개인적인 상황과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윤심덕은 유부남인 김우진과의 금지된 사랑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인적 갈등이 가사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도 가사의 우울하고 비관적인 톤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사를 쓴 지 며칠 후인 8월 3일, 윤심덕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자살한다. 이는 가사가 그녀의 마지막 심경을 반영했음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사의 찬미의 가사는 윤심덕의 개인적 고뇌와 시대적 아픔, 그리고 비극적 운명을 예견하는 듯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우진과는 일본 유학 시절 순례 극단 활동을 통해 처음 만나 가까워졌다. 약 두 달간 동고동락하며 서로를 알아갔다.처음에는 단순한 동료 관계였으나, 조선 각지를 돌며 강연과 문화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문학, 예술, 민족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며 가까워졌다.

윤심덕이 김우진의 하숙집을 찾아와 적극적으로 구애하면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우진은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당시 관습에 따라 어릴 때 집안끼리 정해진 결혼이었지만, 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과 추측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의 주변 인물들은 두 사람이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1926년 8월 4일, 두 사람은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에 함께 탑승했다. 배 위에서 새벽에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이 사건은 그들의 관계에 대한 더 많은 추측을 낳았다. 이처럼 윤심덕과 김우진의 관계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해석과 추측이 존재한다.두 사람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유서는 남기지 않았으며, 정황상 이루지 못할 사랑과 꿈에 절망한 젊은 남녀의 동반자살로 추정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영화나 뮤지컬 등 다양한 창작물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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