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뒤 일장기를 가린 사진  (사진=일본 NHK 방송캡쳐)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뒤 일장기를 가린 사진 (사진=일본 NHK 방송캡쳐)

  손기정은 한국의 유명한 육상 선수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는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달리기 실력을 보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올림픽에 출전해야 했으나,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2초의 기록으로 마라톤 종목에서 우승하며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당시 그는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으나, 한국인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의 우승은 한국인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올림픽 이후, 손기정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의 감시를 받았으며, 그가 입은 옷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불리며, 손기정은 이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었다.

해방 이후, 손기정은 대한체육회 부회장과 육상경기연맹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체육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우승 부상으로 받은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손기정은 2002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업적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손기정은 일제강점기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해야 했고, 시상대에서 일장기를 달고 서야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일본의 승리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고, 그의 한국인 정체성을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특히,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가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후 보도하면서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정간 처분을 받았고, 관련 언론인들이 탄압을 당했다. 손기정도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귀국할 때도 환영 대신 경찰의 연행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손기정은 일본의 감시 아래에서 활동해야 했고, 그의 행동과 말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는 자신의 마라톤 우승을 반납하고 싶다는 심정까지 표현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큰 심리적 부담을 주었다.

손기정의 모친 김복녀 여사는 아들이 운동보다는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다. 이를 위해 아들이 달리지 못하도록 잘 벗겨지는 여아용 고무신을 신기기도 했다. 그러나 손기정은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어서 달렸고, 새끼줄에 발목이 쓸려서 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달렸다. 이러한 손기정의 열정과 끈기는 그의 육상 경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담임교사 이일성의 권유로 육상 선수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복녀 여사의 이러한 배려는 손기정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후, 조선에서는 열광적인 반응이 있었다. 당시 식민지 치하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그의 우승 소식은 큰 자부심과 희망을 주었다. 시골의 아낙네들조차 올림픽이 무엇인지 알게 될 정도로 그의 우승은 큰 화제가 되었다.

또한, 손기정의 우승 소식은 베를린 현지에서 전파를 통해 조선으로 전달되었고, 이는 조선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 국적으로 출전해야 했던 손기정은 자신의 한국인 정체성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그의 민족정신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소식은 일본에서도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신문들은 손기정의 우승을 보도하면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손기정이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기 때문에 일본의 승리로 간주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손기정의 우승은 일본 내에서도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은 손기정을 일본인 선수로서 홍보하려 했지만, 손기정은 자신이 한국인임을 분명히 했고, 이는 일본의 기대와는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정체성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를 드러냈으며, 일본은 그의 우승을 자국의 영광으로 삼으려 했지만, 손기정의 한국인 정체성은 이를 단순히 일본의 승리로 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후 국내에서 열린 기념식은 대규모 환영 행사로 진행되었다. 그의 귀국을 맞아 서울역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고, 환영 인파는 서울 시내를 가득 메웠다. 당시 조선에서는 손기정의 우승이 큰 자부심과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그의 귀국은 마치 국가적인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손기정의 우승을 축하한 광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의 '활명수' 광고다. 이 광고는 1936년 8월 11일에 게재되었으며, 손기정과 남승룡의 우승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광고는 조선 청년의 의기충천(意氣衝天)을 알리며, 암울한 시대에 국민들의 자부심을 북돋우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광고에서는 건강한 체력과 내구력의 근원이 건전한 위장에서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며, "건강한 조선을 목표로 하자"는 민족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광고들은 손기정의 성과를 통해 한국인들의 저력을 강조하고, 일제강점기 하에서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또한 그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은 한국 언론의 보도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우승 후,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후 기사를 게재했다. 이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불리며, 일제강점기 하에서 한국 언론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언론인들이 탄압을 받았고, 동아일보의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은 1년간 감옥에서 복역해야 했다. 또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었던 여운형도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사건은 한국 언론이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한국인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노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이후 다양한 체육 관련 직업을 가졌다. 광복 후, 그는 1948년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1963년에는 육상경기연맹 회장을 맡았다. 또한, 1966년부터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한국대표선수단 단장을 맡았다. 이러한 직책들을 통해 손기정은 한국 체육계의 발전에 기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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