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 (사진출처=온라인 청와대)
육영수 여사 (사진출처=온라인 청와대)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경,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 도중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해 서거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기 시작하자 객석에 있던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총을 발사했다. 문세광은 첫 발을 오발했으나 곧 연단을 향해 달려가며 계속 발포했다. 경호실장 박종규가 응사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방탄 연설대 뒤로 몸을 피해 무사했다. 그러나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쓰러졌고, 결국 서거하게 되었다.

육영수 여사의 유해는 청와대로 이송되어 국민장으로 5일장을 치른 후 8월 19일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장녀 박근혜는 유학 계획을 접고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장남 박지만은 방황하며 성적이 하락해 서울대 진학 목표를 포기하고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변경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8월 20일 정상 집무에 들어갔고, 이후 차지철을 새 경호실장으로 임명했다.

문세광이 저격을 시도한 주된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본래 박정희 대통령을 목표로 삼았지만, 결과적으로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어 사망하게 되었다.

육영수는 박정희가 1963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한민국의 제5대부터 9대까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의 영부인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당시 육군중령이었던 박정희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충청북도 옥천 출신으로, 옥천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배화여고를 졸업했다. 대학 진학을 희망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옥천여자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사회복지 활동으로 어린이회관 설립, 어린이대공원 조성, 정수직업훈련원 등을 설립했다. 고아원, 양로원 위문, 한센병 환자 등 소외계층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 건립,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창간 등 교육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전국의 음성나환자촌 77개소를 순방하며 온정을 베풀었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정기적으로 위문했다. 그녀의 사회봉사 활동과 따뜻한 성품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육영수가 배화고등여학교 재학 시절 일본 수학여행을 거절당한 사건은 당시 그녀의 아버지 육종관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과년한 처녀가 여행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은 당시 여성의 교육과 활동에 대한 사회적 제약을 잘 보여준다.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에 대해 육종관이 반대한 이유는 당시 한국전쟁 중이라는 상황이었다. 또한 박정희가 이미 결혼 후 이혼한 경력이 있었다. 또 이 전쟁통에 박정희가 군인이었다는 점도 반대 이유 중 하나였다.육영수와 박정희의 결혼은 육영수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결혼이었다.

육영수가 자녀들에게 준 가르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청와대의 물건 사용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청와대에서 쓰는 물건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산 것이므로 종이 한 장도 개인용도로 쓰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이는 공직자로서의 청렴성과 책임감을 강조한 것으로, 당시 정부 고위 인사의 배우자로서 모범을 보이고자 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현재도 매년 8월 15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영수 여사 추모식이 열리고 있으며, 서거 50주기를 맞아 2024년 8월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모친의 생가를 방문하고,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묘역을 참배하는 등 그녀를 기리는 행사가 있었다

육영수 여사의 삶과 행동은 여러 면에서 귀감이 되었다. 항상 한복 차림에 단아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소박한 인상을 주었다. 이는 고위 공직자의 배우자로서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설립하고, 서울 구의동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했다. 고아원과 보육원을 방문하여 어린이들의 보건 정책을 추진했다. 한센병 환자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가축 사육을 장려하고 격려했다. 자녀들에게 청와대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구입한 것이므로 종이 한 장도 개인용도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이는 공직자 가족으로서의 책임감과 청렴성을 강조한 중요한 교훈이었다. 청와대를 지키는 경찰들에게 간식을 준비해 선물하는 등 소소한 배려를 실천했다.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 불릴 정도로 재야 여론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당시 정부와 국민 간의 소통 창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육영수 여사의 행동과 태도는 고위 공직자 가족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사회봉사와 청렴성, 그리고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 현재에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엔디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